[독자에게] 확정된 미래
알람이 울리기 전, 나는 잠시 눈을 뜬 채로 천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새벽과 아침의 경계는 늘 애매하다. 그 애매함 속에서 생각들은 유령처럼 떠다닌다. 부익부 빈익빈, K양극화, 피케티, 벼락거지. 단어들은 마치 라디오의 주파수가 맞지 않을 때 흘러나오는 잡음처럼 머릿속을 스쳐 지나간다. 의미를 갖고 있으면서도, 동시에 너무 많이 불려 닳아버린 말들이다.
2026년의 지금, 우리 사회에는 ‘확정된 미래’ 같은 것이 존재한다. 그것은 아직 오지 않았지만, 이미 사람들의 자세와 걸음걸이, 그리고 침묵의 길이를 바꾸어 놓았다. 예전에는 미래가 질문이었다면, 이제는 전제 조건에 가깝다. 온톨로지나 로보틱스 같은 단어들도 그렇다. 몇 년 전의 컨퍼런스 자료에나 나올 법한 말들이 아니라, 곧 우리가 마주해야 할 현실의 문패처럼 느껴진다.
너무 빠르게 진행되었다. 마치 고속도로에서 제한속도를 훨씬 넘겨 달리는 차 안에 탄 기분이다. 몇몇 사람들은 안전벨트를 조이고, 몇몇은 이미 다른 차선으로 갈아탔다. 눈치챈 자들은 ‘돈’에 대한 전략을 바꾸었다. 그건 선언처럼 요란하지 않았고, 오히려 조용했다. 그리고 개인이든 기업이든, 잭팟 축제 열차는 이미 저 멀리 사라진 것처럼 보인다. 우리에게 기적은 늘 그렇듯, 다음 역에 정차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익숙하다.
‘돈’이 더 이상 ‘돈’이 아니고, ‘일’도 더 이상 ‘일’이 아닌 시대가 오고 있다. 예전에는 열정과 꾸준함을 저금하듯 쌓아두면, 언젠가 통장 잔고나 명함의 직함으로 바꿀 수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그 환전소가 문을 닫을 것처럼 보인다. 열정은 자기만족으로, 꾸준함은 개인의 취향 같은 것으로 되돌아온다. 그 변화는 조용하지만, 돌이킬 수 없다.
그래서 나는 포지셔닝이라는 단어를 떠올린다. 그것은 군사 용어 같기도 하고, 체스판 위의 말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만약 시대의 포지셔닝이 변하는 흐름을 조금만 일찍 바라봤다면 어땠을까. SK하이닉스의 직원이 되거나, 하이닉스의 주식을 샀다면. 만약 우리가 은퇴를 위해 현재가치 기준 20억 원이 필요했다면, 그 포지셔닝에 있던 누군가는 30살 이전에 그 목표에 도달했을지도 모른다.
우리는 쉽게 50살이 되기도 전에 퇴직을 걱정하며 살아가는 차장과 부장들의 풍경을 떠올릴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이 개인의 무능이라기보다는 사회가 암묵적으로 맺어온 약속의 결과라는 생각이 든다. 가족을 위해, 개인을 지키기 위해, 우리는 아주 작은 포지셔닝에 집착했다. 살아남기 위해 본질이 아닌 정치에 집중했고, 그 정치가 일상이 되었다. 어쩌면 그것이 한국 사회의 성장이 멈추게 된 한 가지 이유일지도 모른다.
이제 사람들은 기존의 삶의 양태에서 벗어나 다른 직업을 상상하기 시작했다. 지식노동자의 종말이 먼저 오고, 육체노동자의 종말도 뒤따를 것이다. 아마 수 년 이내에. 그렇다면 기존 시스템 안에서 길들여진 인간은 어떤 선택을 해야 할까. 무엇이 우리를 조금 더 오래 살아남게 할까.
그 질문의 답은 다시, 포지셔닝이다. 취업을 한다면 생존 가능한 기업에, 투자를 한다면 역시 생존 가능한 구조에. 그것은 낙관도 비관도 아닌, 일종의 자세에 가깝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인간으로서 아직 살아 있을 때. 즉, 로봇과 알고리즘이 완전히 자리를 차지하기 전에 가치 있는 무언가를 남기고 싶다는 욕심이 있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이유도, 아마 그 욕심 때문일 것이다.
미래는 이미 정해졌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미래 속에서 어디에 서 있을지는, 아직 우리가 정할 수 있다.
나는 그렇게 믿어보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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